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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호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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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목호의 난은 1374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몽골계 목호(牧胡)들의 반란이다. 고려 원 간섭기, 제주도는 원나라의 목마장으로 운영되었고, 몽골인들이 말을 키우며 거주했다. 공민왕의 반원 정책과 명나라의 제주마 요구에 반발한 목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최영이 이끄는 고려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사건은 제주도의 고려 귀속을 확정하고, 명나라와의 외교적 갈등을 심화시켰으며, 위화도 회군을 촉발하여 조선 건국의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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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별초의 항쟁은 최씨 무신정권의 군사조직인 삼별초가 원종의 친몽 정책과 해산 명령에 반발하여 1270년 강화도에서 시작, 배중손을 중심으로 왕족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며 진도와 제주도에서 3년간 고려-원 연합군에 맞서 싸웠으나 1273년 진압되어 고려의 몽골 지배 강화와 원의 제주도 직접 통치를 가져왔으며, 민족적 저항의 상징으로 평가되지만 무신정권의 잔재라는 비판도 있다.
목호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목호의 난
최영의 고려군이 상륙했던 명월포 해안가 (원경의 섬은 비양도)
최영의 고려군이 상륙했던 명월포 해안가 (원경의 섬은 비양도)
개요
분쟁목호의 난
날짜공민왕 23년 (1374년) 9월
장소탐라
결과고려군의 압승
교전 세력
교전국 1고려
교전국 2몽골 목호
탐라
지휘관
지휘관 1최영(崔瑩)
염흥방(廉興邦)
이희필(李希泌)
변안열(邉安烈)
목인길(睦仁吉)
임견미(林堅味)
지윤(池奫)
나세(羅世)
김유(金庾)
정룡(丁龍)
임난수(林蘭秀)《송자대전》(宋子大全) 권164 비(碑) '임장군신도비'
지휘관 2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관음보(觀音保)†
석다시만(石多時萬)†
조장홀고손(趙莊忽古孫)†
병력
병력 1전함 314척, 군사 25,605명
병력 23천 이상?
사상자
사상자 1?
사상자 2?

2. 배경

삼별초의 대몽항쟁이 진압된 원종 14년(1273년) 이후, 탐라군민총관부를 설치하고 다루가치를 두어 다스렸다. 충렬왕 3년(1277년)에는 황실의 말을 탐라에 방목해 목장을 설치하였다. 탐라가 충렬왕 21년(1295년)에 고려에 반환된 뒤에도 제주도는 그대로 원 조정의 목장 기능을 했는데, 이 목장에서 말을 치는 몽골족 목자들을 목호(牧胡)라고 불렀다.[2]

목호들은 탐라에 파견된 고려 관리들의 가혹한 수탈과 부정부패로 인한 탐라 주민들의 반발심을 교묘히 선동하여 고려 조정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획책하기도 했다.[4]

공민왕의 즉위와 더불어 반원정책이 시행되면서 제주에서 목호와 고려 관리의 대립은 더욱 심해졌다. 목호들이 고려 관리를 살해하거나 원 본국에 만호부 설치를 요구하기도 했다. 원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차지한 은 고려에 제주마(濟州馬) 2천 필을 요구하였는데, 제주 목호의 지도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350필만 내어주었고, 명의 사신 항의에 고려 조정은 마침내 탐라 정벌을 결정하였다.

2. 1. 고려의 상황

고려공민왕의 반원 정책으로 원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된 상황이었다. 국내에서는 잦은 전란으로 무인 세력이 득세하고 있었다. 특히 최영, 이성계 등은 홍건적의 난, 왜구 침입, 최유의 난 등을 진압하며 성장한 신흥 무인 세력이었다.

2. 2. 목호의 상황

삼별초에 의한 대몽항쟁이 진압된 원종 14년(1273년) 이후, 원은 삼별초가 점거했던 탐라군민총관부를 설치하고 다루가치를 두어 다스렸으며, 충렬왕 3년(1277년)에는 황실의 말을 탐라에 방목해 목장을 설치하였다. 탐라가 충렬왕 21년(1295년)에 고려에 반환된 뒤에도 제주도는 그대로 원 조정의 목장 기능을 했는데, 이 목장에서 말을 치는 몽골족 목자들을 목호(牧胡)라고 불렀다.[2]

목호는 많을 때는 1,400명에서 1,700명에 이르렀으며, 약 1백 년 동안 제주도에 주둔하며 현지 주민들과 섞여 살면서 말 기르는 기술을 전수하고 탐라 여인과 혼인해 자식을 두기도 했다.[3] 한편으로는 탐라에 파견된 고려 관리들의 가혹한 수탈과 부정부패로 인한 탐라 주민들의 반발심을 교묘히 선동하여 고려 조정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획책하기도 했다.[4]

공민왕의 즉위와 더불어 반원정책이 시행되면서 제주에서 목호와 고려 관리의 대립은 더욱 심해져 목호들이 고려 관리를 살해하거나 원 본국에 요청해 만호부를 설치해줄 것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원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차지, 고려와 수교한 은 고려에 대해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북쪽으로 쫓겨간 원의 잔당(북원)을 치는데 필요한 제주마(濟州馬) 2천 필을 바칠 것을 고려에 요구하였는데, 제주 목호의 지도자였던 석질리필사 · 초고독불화 · 관음보 등은 이에 반발하여 "세조(世祖) 황제(쿠빌라이 칸)께서 방목하신 말을 우리가 어찌 적국인 명에 보낼 수 있단 말인가?"[5][2]라며 350필만 내어주었고, 명의 사신의 항의에 고려 조정은 마침내 탐라를 정벌할 것을 결정하였다.

3. 경과

1374년 8월, 최영을 총사령관으로 한 고려 토벌군이 나주(羅州) 영산포(榮山浦)에서 출정했다. 토벌군은 25,605명의 군사와 314척의 전함으로 구성되었으며, 홍건적의 난, 왜구, 최유의 난 등 여러 전란을 진압한 경험이 있는 정예병이었다.[6]

토벌군은 진도(珍島)에서 추자도(楸子島)까지 보름여 간 역풍을 만나는 등 기상 악화로 어려움을 겪었다. 서해도순문사 김유의 전함 1백 척이 오지 않아 최영은 진도 벽파진에 머무르려 했으나, 다른 장수들이 먼저 추자도로 향하는 바람에 최영도 뒤따라가다 풍랑으로 함선 상당수가 파손되는 피해를 보았다.[5]

이후 전투 과정은 === 주요 전투 === 문단을 참조하라.

최영은 범섬에서 달아난 석다시만(石多時萬) · 조장홀고손(趙莊忽古孫) 등 105인을 추격하여 동도(東道) 아막에서 농성하던 잔당을 격파하고, 도망치는 목호 무리를 샅샅이 찾아내 모두 죽였다.[5][11]

고려군은 목호에게서 얻은 말 1,700필 중 774필은 현지 관인에게 맡겨 기르게 하고, 금패(金牌)와 은패(銀牌), 인신(印信)은 제주의 고려 관원과 탐라 토착 지도자들에게 나눠주었다. 나머지 말을 가지고 9월 22일 명월포를 출발한 고려군은 화탈도(火脫島)에서 역풍을 만나 명월포로 회항했다가 다음날 다시 출항하여 추자도에 도착했다. 10월 5일에야 추자도를 출발해 풍랑을 뚫고 소한도, 보길도, 진도를 거쳐 11월 3일에 목포 해안에 도착했으며, 배에 실은 말 가운데 93필이 풍랑으로 죽었다.[6]

최영이 제주를 떠난 지 13일 만에 제주에서 마적(馬賊) 차현유(車玄有)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자 문신보(文臣輔)와 성주 고실개(高實開)에 의해 한 달여 만에 진압되었다.

3. 1. 주요 전투

1374년 8월 28일, 고려군은 명월포(明月浦)에 도착하여 전임 제주목사 박윤청을 통해 탐라성주와 왕자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목호 지도자 석질리필사는 최영이 보낸 문서를 찢고 협상을 거부하며, 고려군 배 11척에 나눠 타고 상륙한 고려군을 3천 기병으로 몰살시켰다.[5] 이보다 앞서 탐라에 와 있던 고려 안무사 이하생도 살해되었다. 목호의 기세에 눌려 고려 군사들이 진군을 망설이자, 최영은 비장(裨將, 하급장교) 한 명을 처형하여 군기를 잡고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베어 조리돌려 보인뒤 해안 상륙 전투를 지휘했다.

고려군은 30리까지 추격하여 목호들의 말을 빼앗아 기병대를 갖추고 명월포(명월촌), 어름비, 밝은오름, 검은데기오름 방면에서 밤낮으로 전투를 벌였다.[6] 목호 지도자 석질리필사 등은 고려군을 새별오름[5][9]으로 유인해 결전을 벌이려 했으나, 최영은 이를 간파하고 급히 추격했다.[5] 수세에 몰린 목호들은 연래(延來)와 홍로(烘爐)를[6] 거쳐 서귀포(西歸浦) 남쪽 범섬으로 달아났다.

최영은 빠른 배 40척으로 범섬을 포위하고 정병을 이끌고 섬에 들어갔다. 궁지에 몰린 석질리필사는 세 아들을 데리고 나와 항복했지만, 다른 목호 지도자 초고독불화와 관음보는 벼랑에서 뛰어내려 자결했다.[5][10] 최영은 항복한 석질리필사와 세 아들을 처형하고, 자결한 두 목호 지도자의 시신을 찾아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

4. 영향

목호의 난을 진압함으로써 그때까지 반은 고려, 반은 몽골의 세력 아래 있던 제주도는 완벽하게 고려에 귀속되었다. 그러나 제주도는 전보다 더 많은 마필 공납 요구에 시달렸다. 우왕 5년(1379년)부터 공양왕 4년(1392년)까지 고려에서 에 바친 약 3만 필의 말 가운데 2만 필 이상이 탐라산이었다.[5]

공민왕 19년(1370년)에 고려는 명에 《탐라계품표》를 올려 제주는 예전부터 고려의 땅이며, 몽골은 단지 제주의 목초지만을 빌려 썼을 뿐이라는 과거의 연고를 내세워 탐라를 고려령으로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명은 이를 바로 인정하거나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고려를 강압해 탐라의 말만을 요구하였다. 이후 우왕 12년(1386년)에 명은 사실상 말을 바치라는 탐라 말 구매 의사를 고려에 전달했다가 이듬해에 철회하면서 고려 조정의 제주도 영유권을 비로소 인정했다.[5]

목호의 난에는 탐라에 와있던 몽골인뿐 아니라 몽골인과 탐라인 사이에 태어난 반(半)몽골화된 탐라인들도 상당수 가담했다. 그러나 최영의 고려군에 의해 난이 진압된 직후 차현유, 강백언(姜伯彦) 등 목호 잔당들에 의해 일어난 소란에서는 탐라 주민들이 거의 동참하지 않았고, 반란 진압도 제주의 토착 세력들에 의해 이루어졌다.[12]

4. 1. 정치적 영향

최영이 제주도로 내려가 있는 사이에 개경에서는 공민왕이 시해되었고, 명나라 사신 임밀과 채빈은 말을 가지고 돌아가던 중 개주참(開州站)에서 고려의 관리 김의에게 피살되었다(김의는 사건 직후 북원으로 도주).[5] 이는 고려와 명의 외교관계를 험악하게 만들었고, 명의 철령위(鐵嶺衛) 설치 통보로 요동 정벌 시도가 촉발되었다. 이때 우왕(禑王)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써 직접 정벌군을 지휘하려는 최영을 "선왕(공민왕)이 시해된 것은 경(최영)이 남쪽(제주)으로 정벌하러 나가서 개경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라며 곁에 붙잡아두려 하였다.[5] 결국 최영 대신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가 요동정벌군을 지휘하게 되었고, 위화도(威化島)에서 군사를 돌려(위화도 회군) 최영을 처형하고 우왕을 폐위시킴으로써, 조선 건국의 단초를 마련하게 된다.

4. 2. 사회·문화적 영향

목호의 난은 제주도민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탐라인들은 점차 목호 잔당을 배척하고, 몽골과의 관계를 부정하려는 태도를 보였다.[12] 조선 시대에 이르러 목호의 난은 "우리 동족도 아닌 것들이 섞여들어 갑인의 변(목호의 난)을 불러왔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메웠고 간과 뇌수로 땅을 발랐으니, 말하자면 목이 멘다."[12]고 하여 치열했던 전란의 모습을 회고하였다.

5. 관련 작품

목호의 난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는 뮤지컬, 소설, 만화 등이 있다. 2002년 뮤지컬 《범섬의 숨비소리》가 공연되었고, 2015년에는 이성준의 소설 《탐라, 노을 속에 지다》(전2권)가 출간되었다. 정용연은 만화 〈목호〉를 2014년 무크지 《보고》에 연재했고, 2019년 《목호의 난:1374 제주》를 출간했다.

5. 1. 뮤지컬

《범섬의 숨비소리》(2002)는 목호의 난을 소재로 한 뮤지컬이다.

5. 2. 소설

이성준, 《탐라, 노을 속에 지다》(전2권) 도서출판 각, 2015년[1]: 목호의 난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5. 3. 만화

정용연은 〈목호〉를 무크지 《보고》(1호 ~ 5호) (도서출판(주)휴머니스트, 2014년)에 연재했고, 2019년에는 《목호의 난:1374 제주》(딸기책방)를 출간했다.[1]

참조

[1] 서적 송자대전
[2] 웹사이트 목호의 난 https://terms.naver.[...]
[3] 서적 신증동국여지승람
[4] 서적 고려사
[5] 서적 고려사
[6] 서적 이문
[7] 서적 고려사
[8] 서적 고려시대 탐라사 연구 신서원 2000
[9] 서적 고려사
[10] 서적 이문
[11] 서적 이문
[12] 서적 신증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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